PISA 1등인데 문해력 위기? 우리 아이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
[교육 칼럼] 육팔사 교육전문기자
"선생님, 교과서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지난달 만난 중학교 국어교사 A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아이들은 교과서를 읽어도 내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단어 하나하나는 아는데, 문장 전체가 무슨 뜻인지는 모른다고 해요."
실제로 2023년 조사에 따르면, 교사의 91.8%가 학생들의 문해력이 과거보다 저하되었다고 응답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학생의 30.4%가 교과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한국 학생들은 PISA(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여전히 읽기 영역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세계 1등급 성적인데 왜 현장에서는 위기를 말하는 걸까?
PISA의 역설: 시험은 잘 보는데 책은 못 읽는 아이들이 모순의 비밀은 PISA가 무엇을 측정하는지를 들여다보면 풀린다. PISA는 주어진 지문에서 정답을 빠르고 정확하게 찾아내는 능력을 평가한다. 마치 보물찾기처럼, 텍스트라는 지도에서 정보라는 보물을 캐내는 게임이다.
한국 교육은 이런 게임에 최적화되어 있다. 수능을 비롯한 표준화 시험을 준비하며, 우리 학생들은 지문에서 답을 찾는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한다. 그 결과? PISA에서는 최고 점수를 받는다.
문제는 실제 세상은 PISA와 다르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정답이 지문 안에 깔끔하게 적혀 있지 않다. 인터넷에는 진짜와 가짜 정보가 뒤섞여 있고, 하나의 사안에 대해 서로 모순되는 주장들이 난무한다. 이런 혼란 속에서 무엇이 신뢰할 만한 정보인지 판단하고, 여러 정보를 종합해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하는 능력이 진짜 문해력이다.
결국 우리 아이들은 '시험 속 읽기'는 잘하지만, '삶을 위한 읽기'는 서툰 것이다.
유튜브 세대의 3줄 요약 문화
고등학생 딸을 둔 학부모 B씨의 하소연을 들어보자. "숙제로 책을 읽으라고 하면, 유튜브에서 '3줄 요약' 영상부터 찾습니다. 긴 글은 아예 읽으려 하지 않아요."
틱톡, 유튜브 쇼츠로 대표되는 숏폼 콘텐츠 시대다. 15초, 1분 안에 모든 정보를 압축해서 소비하는 데 익숙한 세대에게, 한 권의 책은 너무 길고 느리다. 문제는 이런 습관이 뇌의 '읽기 회로'를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인지신경과학자들은 독서를 "뇌의 전신 운동"이라고 부른다. 글을 읽는 짧은 순간, 뇌는 문자를 인식하고, 소리로 바꾸고, 의미를 파악하고, 맥락을 추론하며, 감정까지 동원하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뇌의 신경회로는 점점 강해진다.
그런데 요약본만 보는 습관은 이 중요한 훈련 과정을 생략한다. 마치 운동 대신 영양제만 먹는 것과 같다. 당장은 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사고력, 분석력, 창의력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킨다.
다독의 신화를 넘어서
"우리 아이 이번 달에 벌써 책 10권 읽었어요!"
학부모들 사이에서 흔히 듣는 자랑이다. 독서 권수를 경쟁하고, '다독(多讀)'을 미덕으로 여기는 문화가 여전하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한 학기 한 권 읽기' 같은 제도를 운영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냉정하게 말한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문해력이 저절로 좋아지지 않습니다."
교육학의 거장 벤자민 블룸(Benjamin Bloom)은 학습을 6단계로 나눴다. 기억 → 이해 → 적용 → 분석 → 평가 → 창조. 이 중에서 진짜 중요한 건 한가운데 있는 '분석'과 '평가' 단계다.
그런데 지금 우리 독서 교육을 보자. 책을 읽고(기억, 이해), 곧바로 독후감을 쓰거나 발표한다(창조). 중간의 분석과 평가 단계가 쏙 빠져 있다. 이건 마치 기초 공사 없이 건물을 올리는 것과 같다.
학생들이 쓴 독후감이 왜 그렇게 뻔하고 피상적일까? 창의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텍스트를 깊이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독서논술학원의 착각
사교육 시장도 마찬가지다. 요즘 독서논술학원들은 '토론 잘하기', '논리적 글쓰기' 같은 가시적인 결과물에 집중한다. 부모들도 이런 결과를 원한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자.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학생이 그 내용으로 토론을 하면 어떻게 될까? 책과는 상관없는 자기 생각만 늘어놓게 된다. '내용 생성 첨삭지도'라는 이름으로 글쓰기를 가르치지만, 정작 텍스트에 근거한 논증(evidence-based argument)이 아니라 단순한 의견 표현(opinion expression)에 그친다.
좋은 글은 좋은 분석의 '결과'다. 분석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이 순서를 무시한 교육은 사상누각이다.
정답이 있는 독서? 창의성을 죽이는 거 아닌가요
"정답이 있는 독서"라는 말을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반발한다. "독서는 자유로워야 하는데, 정답을 강요하면 창의성을 죽이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정답'은 획일적인 해석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텍스트에 실제로 쓰여 있는 것을 정확히 파악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글에서 저자가 "기후변화는 인간 활동 때문이며, 화석연료 사용을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면, 학생은 일단 이 사실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저자의 주장이 무엇인지, 어떤 근거를 제시했는지, 논리 구조는 어떠한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이것이 '정답'이다.
그 다음에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저자의 근거가 부족하다" 같은 비판적 평가와 창의적 해석이 나와야 한다. 순서가 중요하다.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자유롭게 해석하라고 하면, 그건 그냥 엉뚱한 소리가 될 뿐이다.
17가지 프레임으로 글을 뜯어 읽는 법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CPS 문해력 센터의 접근법이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센터는 '프레임 국어'라는 독특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학생들에게 글을 읽는 17가지 '분석 프레임'을 가르친다. 어휘, 문장 구조, 논리 전개, 표현 기법 등 다양한 관점에서 텍스트를 체계적으로 해부하는 도구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는 무엇인가?", "이 단락에서 중심 생각은?", "저자는 어떤 근거로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가?", "이 표현은 어떤 효과를 노리는가?" 같은 구체적인 질문들이다.
단순히 "열심히 읽어라"가 아니라 "이렇게 읽어라"를 가르치는 것이다. 마치 운동선수에게 정확한 폼을 가르치듯, 독해에도 정확한 방법이 있다는 철학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어휘 5000' 프로그램이다. 단순히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게 아니라, '추론', '추정', '추측' 같은 비슷한 말들의 미묘한 차이를 예문을 통해 정확히 구분하도록 훈련한다. 정밀한 어휘력 없이는 복잡한 개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것
그렇다면 가정에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첫째, 질문을 바꿔라.
"오늘 책 몇 권 읽었어?" 대신
"이 책에서 작가는 뭘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
"그 주장에 네가 동의해? 왜?"
"작가가 든 예시가 설득력 있었어?"
이런 질문들이 아이의 뇌를 분석 모드로 전환시킨다.
둘째, 디지털 다이어트를 실천하라.
요약 영상, 숏폼 콘텐츠를 완전히 금지할 순 없다. 하지만 하루 30분이라도 긴 호흡의 글을 읽는 시간을 확보하라. 책이 아니어도 좋다. 긴 기사, 에세이도 괜찮다.
셋째, 함께 읽고 대화하라.
같은 책을 읽고 서로 생각을 나누는 것만큼 좋은 독서 교육은 없다. "엄마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라는 대화가 아이의 비판적 사고를 키운다.
교육 정책은 무엇을 바꿔야 하나
교육부와 정책 입안자들에게도 숙제가 있다.
첫째, 평가 방식을 바꿔야 한다. PISA처럼 단일 텍스트에서 정답 찾기만 측정할 게 아니라, 여러 출처의 정보를 비교하고 허위정보를 판별하는 '다문서 읽기' 능력을 평가해야 한다. 진짜 세상은 그렇게 작동하니까.
둘째, 교사 연수를 강화해야 한다. "분석적으로 읽는 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얼마나 될까? 교사들에게 체계적인 독해 교수법을 훈련시켜야 한다.
셋째, 교과서를 개선해야 한다. 지금처럼 원문을 요약해서 싣지 말고, 좀 적더라도 완전한 텍스트를 제공하라. 한 편의 글 전체를 읽으며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경험이 중요하다.
문해력은 민주주의의 토대다
문해력이 왜 중요한가? 단순히 시험 점수나 학업 성취 때문이 아니다.
디지털 시대, 가짜뉴스와 편향된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우리 아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한다. 어떤 정보가 신뢰할 만한지,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지, 누구의 말에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은 교육의 문제이자 민주주의의 문제다. 비판적으로 읽고 생각하지 못하는 시민들로 가득 찬 사회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책의 권수를 세는 대신, 한 권을 깊이 읽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창의적인 결과물을 요구하기 전에, 텍스트를 정밀하게 분석하는 도구를 주어야 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검증하고 평가하는 나침반을 쥐어줘야 한다.
문해력은 정보와 지혜를 잇는 다리다. 그 다리를 튼튼하게 놓는 것, 그것이 다음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가정에서 실천하는 문해력 키우기 5원칙
"몇 권?" 대신 "어떻게?"를 물어라
독서량보다 이해의 깊이를 확인하라
하루 30분, 긴 글 읽기 시간 확보
숏폼 콘텐츠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필요하다
함께 읽고 토론하라
같은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는 대화의 시간
"네 생각은?" 전에 "작가 생각은?"
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한 후 평가하도록 유도
정보의 출처를 확인하는 습관
인터넷 정보를 볼 때 "이건 누가 쓴 거야?" 질문하기
이 칼럼은 최근 문해력 위기에 대한 교육계 논의와 CPS 문해력 센터 등의 사례를 종합하여 작성되었다.